티스토리 뷰

목차



    오베라는 남자
    <오베라는 남자> 책 표지

    1. 저자 프레드릭 배크만 소개

    시대와 공동체를 살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스웨덴의 한 블로거에서 전 세계를 사로잡은 초대형 작가가 된 프레드릭 배크만. 데뷔작이자 첫 장편소설인 <오베라는 남자>는 그의 블로그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오베'라는 캐릭터에 반해 그의 이야기를 더 써줄 것을 요청했고 그렇게 <오베라는 남자>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오베라는 남자>는 인구 9백만의 스웨덴에서 84만 부 이상, 전 세계 280만 부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우며 프레드릭 배크만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줍니다.

    2. 줄거리

    주인공의 이름은 오베. 50대 후반의 남성으로 철도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얼마 전에 해고됐습니다. 오베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칭찬에는 인색하고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면 용납을 못하는 성격 그러면서 또 뭐 정은 많은 성격입니다. 이런 성격 이 아저씨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기상을 하고 커피도 늘 마시던 시간에 마시던 양으로 딱 맞춰야 하며 매일 순찰하듯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불편한 것들을 찾아내서 참견하고 해결하려고 듭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 아저씨가 지금껏 사회라는 곳에서 어떻게든 어우러져서 살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의 아내 소냐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납니다. 아내인 소냐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기 몸이 불편한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학습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던 인물입니다. 이것만 들어봐도 남편이랑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가까운 친구들조차 인정을 해주지 않던 무뚝뚝하고 멋대가리 없는 남편 오베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남편도 아내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어려운 과정으로 성장을 하는 동안 이분법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오베에게 유일한 예외가 아내였습니다. 그런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오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직장뿐이었습니다. 책임감 때문에 몇 개월을 더 버텼던 오베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것은 그의 유일한 삶의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베는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하고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자신이 목을 맬 줄을 설치할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그의 성격대로 치수를 재고 딱 맞게 깔끔하게 드릴로 구멍을 내고 줄을 걸고 목을 걸면 되겠다 생각합니다. 그때 누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문 앞에는 얼마 전에 주차 문제 때문에 오베한테 쓴소리를 들었던 여성이 서 있었는데 새로 이사 왔다고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파르바네. 이란인 여성으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을 하고 있고 두 딸을 키우면서 뱃속에 셋째 아이까지 임신 중인 여성입니다. 그녀가 불쑥 오베한테 먹을 것을 들이밀면서 말을 시킵니다. 결국 이번 계획은 실패. 그래서 또 다른 방법으로 죽으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계속 이웃들로 인해 오베의 계획은 무산됐습니다. 오히려 그 일로 인해서 이웃들이 도움을 받는 황당한 상황이 시작됩니다. 파르바네가 버스도 제대로 탈 수 없고 운전도 못한다는 얘기를 듣자 일단 운전이라도 가르쳐 주고 죽어야겠다며 자살이 뒤로 밀리게 됩니다. 오베는 인정을 베풀려고 한 의도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될 걸 못하는 꼴이 불편했던 거고 그로 인해서 또 다른 일이 생기고 또 다른 일이 또 생기는 게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해결해 놓고 죽자고 한 것입니다. 근데 그런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됩니다. 덕분에 억지로 이웃들하고 얽혀 지내게 된 오베. 과연 오베는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있을까? 

    3. <오베라는 남자> 독자 서평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죽음을 결심하고도 자신의 성격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남자. 참 재미있는 소재입니다. 죽지 못하는 오베의 상황, 세상 혼자 살 것처럼 뻣뻣하던 아저씨가 이웃과 어우러지게 되는 웃픈 이야기. 이런 것들이 관계의 따뜻함을 그리워하고 있는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 동네에 오베라는 남자가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렵지 않게 자살했을 겁니다. 게다가 죽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발견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근처에 누가 사는지, 누가 죽었는지 누가 태어났는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살하기 전부터 곤욕을 치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마음 한편으로 함께라는 것의 따뜻함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TV에서 나오는 크고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에 감동하고 칭찬도 합니다. 다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드러내지 않는 사회에 도착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너무 빨리 넘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관계, 함께 이런 것들과 충분히 작별할 시간을 갖지도 못한 채 코로나19 팬데믹을 타고 너무 빠르게 넘어오다 보니까 함께하는 삶에 대한 그리움은 늘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